Philosophical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Kant 2013. 12. 7. 14:58

<실천이성비판> 강독

 

 

저서 소개

 

칸트의 제 2 비판서임에도 불구하고 <도덕형이상학의 정초>보다 덜 읽히고 있는 저서. 그 원인은 아마도 <도덕형이상학의 정초>가 더 분량이 적고, 꼭 전문 칸트 철학 지식이 없이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일 것(특히 1, 2 ). 그러나 <도덕형이상학의 정초>와 <실천이성비판>은 많은 내용에서 서로 중복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천이성비판>에서만 다뤄지는 문제들이 있다.

 

주석서는 Lewis White Beck의 것이 거의 유일함. 벡은 이 작품이 다른 칸트의 저서들보다 간결한 문체로 쉽고 명확하게 써졌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의심이 가는 부분임. 그는 또 이 작품은 단 기간에 집필되었기 때문에 <순수이성비판>에서와 같은 소위 “patch-work”이론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함.

 

 

<실천이성비판> 의 성립

 

순수한 실천철학의 원리를 확립하려는 칸트의 의도는, 1760년대부터 도덕의 형이상학을 집필하겠다는 의지에서 자주 확인되곤 했는데, 정작 <순수이성비판>의 준비에 밀려 계속 미루어지다가 1785년 <도덕형이상학의 정초>에서 첫 결실을 보았다. 그렇지만 <도덕형이상학의 정초>라는 제목(추후적으로 붙인)에서도 암시되고 있듯이 칸트는 이 저서를 도덕 형이상학으로 간주하기에는 미흡함이 많다고 느꼈고 다시 <실천이성비판>을 펴내기에 이름.

 

그런데 문제는 정작 칸트 자신이 <도덕형이상학의 정초> 머리말에서 실천이성의 비판이 불필요하다는 주장을 했었다는 점이다. 변증성에 빠지는 성향이 있는 사변이성(이론이성)의 경우와 달리 실천이성은 누구나 실제로 올바르고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만을 위한 비판이 따로 필요하지 않고, 또 실천이성도 이성이니만큼 이론이성과 같은 공동의 원리에 의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자신이 아직 그렇게 완전한 정도의 작업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점을 고백하고 있다. 그는 또 도덕 형이상학과 관련해서는 그것은 매우 정치한subtil 부분을 포함할 뿐 아니라 통속성에 대한 요구와 상식에도 적합하여야 하는데, 먼저 전자를 다루고 나서 후자를 따로 다루는 것이 둘 다를 함께 다루는 것보다 용이하다고 했다. 그래서 <도덕형이상학의 정초>를 먼저 펴낸다는 것이었음.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해석상의 어려움에 봉착한다. 먼저 왜 필요 없다고 했던 실천 이성의 비판을 집필했는가.

 

두 번째 어려움은 그가 <도덕형이상학의 정초>3부의 내용을 도덕형이상학으로부터 순수실천이성의 비판으로의 이행으로 규정한 사실에서 발생한다. 이 규정대로라면 도덕의 형이상학은 이 저서의 제 2부에서 이미 수행된 것으로 보아야 하며, 실천 이성 비판은 도덕 형이상학의 예비 작업이 될 수 없는 셈이 된다.

 

 

난문에 대해 가능한 해답(벡의 해석)

 

이미 보았듯이 <도덕형이상학의 정초>1, 2 부는 분석적 방법을 택하고 있다. 일상적 도덕 경험을 분석하여 순수한 도덕성의 원리를 찾는 작업. 그래서 발견한 것이 정언명법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우리의 행위동기를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아니었다. 즉 우리의 의무감(혹은 도덕명령에 대한 존경)이 실제로 우리 행위의 동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어떤 행위(남의 행위이든 나 자신의 행위이든)에 관해 도덕적인 평가를 내릴 때, 그 평가의 기준으로 도덕 법칙(명령)을 상정하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실제로도 그러한 도덕 법칙에 따라(의무로부터) 행동한다거나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아니다. 벡은 이와 관련하여 <도덕형이상학의 정초>1, 2 부가 만일 그 자체로 끝나버렸다면 칸트가 petitio principii의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함. 즉 거기서 그가 행한 것이 도덕성이나 도덕 법칙 개념을 설명한 것이지 그 실제 가능성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면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증명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칸트는 우리 의지가 자유롭다는 것을 증명해주어야 한다고 함. 이것이 증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정언명법은 단지 가설로서만 가능하다는 것임. 그러므로 1, 2 장에서 다룬 내용은 이미 순수 도덕 이론, 즉 도덕형이상학의 내용과 다를 바 없으나(도덕성의 원리를 제시했으므로), 거기서 주장된 내용의 현실적인 가능성에 대한 검토는 제 3 장에서 다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의지의 자유와 도덕 법칙의 불가분성을 지적한 정도에 그침.

 

한편 <도덕형이상학의 정초>가 <순수이성비판>의 체계와 서로 맞지 않는다는 비판 등 여러 비판(오해: 이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Karl Vorländer“Einleitung”을 참조)이 있었고(계획도 없이 급히 <실천이성비판>에 착수한 이유), 칸트 스스로도 <도덕형이상학의 정초>3부가 비록 자유의지의 문제를 다루긴 했으나 체계적인 방식으로 다루지 못했다는 점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이 문제를 굳이 실천철학에서 다시 다루어야 할 만큼 중요 문제로 생각하지는 않았다(B 831).

 

어쨌거나 칸트 자신은 1785년 이후에도 거듭 도덕의 형이상학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으나 그 결과는 의외로 다시 <실천이성비판>으로 나타났다. 확실한 것은 그가 이 저서를 <도덕형이상학의 정초>와 마찬가지로 역시 도덕 형이상학(넓은 의미의 도덕 형이상학, 즉 통속성과 상식까지 고려하는 부분을 포함한)의 예비 단계로 간주했다는 것, 그리고 비교적 단기간 내에 집필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준비 기간이 짧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엄밀히 증명되기는 힘든 것처럼 보인다.

 

 

책 제목(왜 <순수 실천 이성의 비판>이 아니고 <실천이성비판>이냐?)에 관한 칸트의 설명 (Vorrede 3)

 

1비판의 경우는 순수한 이론(사변)이성의 월권, 즉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는 초월적 대상들을 문제삼으려는 변증성을 비판한 것. 반면 순수한 실천이성은 그러한 비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순수한 실천이성이 실천적임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만일 우리가 어떤 특정한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할 때와 같이(예컨대 몸무게를 빼려할 때) 이 세계 안의 사물들의 질서에 관한 우리의 경험(적 지식)으로부터 도출해 내는 실천 법칙(가언적 규칙, 준칙)과는 전혀 다른 실천의 법칙이 있다면, 즉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법칙을 실천 이성이 제시할 수 있다면, 이때의 이성은 순수한 실천이성이라고 한다. 그러한 무조건적인 법칙을 경험적인 실천 이성이 제시할 수는 없기 때문.

 

[순수한rein”이란 의미는 인식과 관련해서는 경험과 무관한 인식, a priori를 의미하거나 경험적 내용을 갖지 않은 인식을 뜻하고, 심성의 능력과 관련해서는 선천적으로 입법적임a priori gesetzgebend을 의미한다.

고로 도덕법칙은 ①②의 의미에서, 의무 개념은 의 의미에서만, 실천이성은 의 의미에서 순수함.]

 

다시 말해 이론 이성의 경우에는 순수한 이론 이성이 비판을 받아야 하지만, 실천 이성비판의 경우는 그저 실천적 능력으로서 이성 능력 일반을 검토하되 경험적으로 조건 지어진 실천 이성이 월권을 행사하여 도덕적 행위의 동기에 개입하는 것을 막는 것이 그 비판의 목적이자 관건이라는 것. 그래서 굳이 순수한이란 수식어를 달 필요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순수한 실천이성(명령, 법칙)의 가능성 자체가 관건이며, 굳이 순수함에 초점을 맞추어 실천이성을 문제 삼는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1 비판에서 비판,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순수한) 이성 능력의 한계를 설정하고 변증적 가상을 막는 기능을 하는 것이었고(합리론의 독단적 형이상학에 대한 대답), 적극적 의미에서는 학문과 도덕의 안전한 영역을 회의론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도 수행하는 것이었다(경험론적 회의주의에 대한 대답). 그런데 2 비판에서는 그 제목과 관련해 칸트가 주장하는 바에 의해 판단해 볼 때 소극적 의미의 비판만이 주로 의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도덕형이상학의 정초>에서도 같은 맥락). 즉 행위를 의욕하는 의지가 경험적 동기들에 기초하는 실천 이성의 월권적 주장에 의해 규정되는 것을 제한 또는 방지한다는 의미. 그러나 이와는 달리 <실천이성비판>의 본론에서는 다시 순수한 실천 이성도 변증론에 빠진다고 하므로 이것 역시 비판을 요구한다고 볼 수 있다. 고로 제목에 관한 그의 해명이 그다지 정합적이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